고택매니저_수곡고택

자연문화의 조화로운 삶

문화가 있는 곳에 미래문화재단이 있습니다.

보백당종택ㆍ묵계서원 숙박 안내 및 예약
객실예약현황
2024.09.29 ~ 2024.10.05 예약초기화
객실명 29(일) 30(월) 1(화) 2(수) 3(목) 4(금) 5(토)
보백당종택 전체대관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보백당종택- 안채 보물&청백방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보백당종택- 사랑방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보백당종택- 보백당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묵계서원- 입교당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전체대관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마감
객실정보
객실 인원 주중 주말
(금, 토)
성수기
(8월~10월)
시설
보백당종택 전체대관 12~16 650,000 750,000 750,000 객실 4개
에어컨,선풍기
현대식 화장실, 샤워실 3개
부엌, 냉장고, 정수기
보백당종택- 안채 보물&청백방 2~6 180,000 200,000 200,000 에어컨,선풍기
전기난방
전용 화장실, 샤워실,
공용냉장고, 공용정수기 사용
3인 이상 예약시 방2개 이용가능
보백당종택- 사랑방 2~4 150,000 180,000 180,000 에어컨
전기난방
전용 화장실, 샤워실
큰방 1개
보백당종택- 보백당 2~5 200,000 240,000 240,000 독채(별채)
에어컨
전기난방
전용 화장실, 샤워실
방1개, 마루
묵계서원- 입교당 4~10 300,000 360,000 360,000 독채
에어컨(양쪽설치)
,선풍기/전기난방
큰 마루
4인이상 예약시
방2개 사용가능
전용 화장실, 샤워실
보백당종택ㆍ묵계서원
전체대관
20~24 1,000,000 1,200,000 1,200,000 객실 6개
객실별
에어컨,선풍기
현대식 화장실,
샤워실, 부엌,
정수기 완비
객실운영안내

1) 입/퇴실 안내

- 보백당 종택 입실 : 15시 ~ 18시 (18시 이후 입실 시 비대면 응대)

- 보백당 종택 퇴실 : 11시

- 묵계서원 입교당 입실 : 17시 ~ 18시 (18시 이후 입실 시 비대면 응대)

- 묵계서원 입교당 퇴실 : 11시

 

2) 추가비용안내

- 기준 인원 초과시 1인당 추가 비용 발생

- 생후 36개월 ~ 미취학아동 2만원 추가

- 취학아동 ~ 성인 : 3만원 추가

 

3) 숙박객 특별 혜택

- 카페만휴정 1인당 아메리카노 무료 제공

- 만휴정 무료 입장

- 유생복 체험 무료

- 기타 유료 체험 50% 할인 제공 (사전예약 https://yeokiro53.com/)

 

대관료

구분

인원

사용료
1일(8시간) 오전(4시간) 오후(4시간) 2시간
묵계서원 입교당

30인
이하

150,000 90,000 90,000 50,000
읍청루

20인
이하

120,000 70,000 70,000 50,000

보백당
종택

보백당

20인
이하

140,000 80,000 80,000 50,000
만휴정 전체

10인
이하

200,000 120,000 120,000 70,000

*강의, 회의, 교육, 독서회, 서예, 다도회, 공연 등
*문화재의 보존과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 가능한 행사
*촬영으로 인한 대관은 ‘지정문화재 촬영 허가 공문’ 필수 (사전 협의)
*문의전화 : 054-841-2433(미래문화재단) / 010-9930-0313(고택매니저)

 

숙박 정보

객실배치도 : 보백당종택

※ 붉은선은 비상시 대피안내선입니다.

 

객실배치도 : 묵계서원

※ 붉은선은 비상시 대피안내선입니다.

 

객실배치도 : 만휴정

 

오시는길

[시내버스 이용시] / 버스요금 : 1,500원]

안동터미널에서 610번 버스 승차 (108분 소요) - 묵계에서 하차

 

[자가용 이용시]

서안동 나들목 → 안동 → 영덕방면(34번국도) → 안동대학교 앞 길안방면(35번국도) → 길안 → 영천방면 → 묵계1리 버스 승강장 → 묵계종택(50m), 묵계서원(200m), 만휴정(700m)

 

[내비게이션 안내시]

묵계서원_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국만리길 72
보백당종택_ 경북 안동시 길안면 충효로 1736-5
만휴정_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하리길 42

 

고택 소개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다” 김계행선생의 종택, 묵계종택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계명산 남서쪽 끝자락 언덕 위에 보백당 선생의 종택인 안동김씨 묵계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종택은 강 건너 상리(上里)에 있었으나, 화재로 전소되고 잠시 고난리(古蘭里)로 우거(寓居)하였다가 1700년대에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으로 일부가 소실되어 전란 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돌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백당이란 현판은 김계행 선생의 자호(自號)로 평소 선생께서 생활철학이 담긴 시귀(詩句)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우리집에는 보물이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이며, 대청의 왼쪽 측면과 뒷벽에는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미세기 창을 달았다.

그 옆에는 1909년 보백당 선생의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을 받고, 지역 유림과 자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불천위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묵계종택은 묵계서원과 함께 1980년 지방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자료출처_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 묵계서원

 

묵계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선생과 응계(凝溪) 옥고(玉沽) 선생을 봉향(奉享)하는 서원으로 조선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었다. 보백당 선생은 조선 초기 성종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명신이며 응계선생은 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다. 고종 6년(1869)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祠當)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없어진 건물들을 새로 짓고 서원을 복설하였다.

강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가운데 6간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들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는 이를 관리하는 정면 6간, 측면 5간의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은 것이다. 고건물답게 부재를 다룬 수법에 격조가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정자, 만휴정(晩休亭)

 

만휴정은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공의 정자이다.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처마 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1500년(연산군 6)에 건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중수를 거치면서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일부만 조선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다.

김계행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연산군 폭정을 만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땅으로 낙향했다. 그 후 설못(현 소산2리)가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으나 길 옆인 관계로 더욱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길안면 묵계서원에서 개울건너 산곡 간에 들어서면 웅장한 계곡에 반석위로 폭포를 동반한 곡간수(谷澗水)가 흐르는 절경을 이루는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물

김계행

생애 이야기

인물 정보
성명 김계행(金係行) , 1431년 ~ 1521년 본관 안동(安東)
취사(取斯) 보백당(寶白堂) 시호 정헌(定獻)
출생지 안동(安東) 불정촌(佛頂村) 출신지 안동(安東)
분묘지 예천(醴泉) 직곡(稷谷)
입사경로 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 합격, 1480년(성종 11) 식년시(式年試) 병과 급제
내관직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외관직 고령현감(高靈縣監), 성주교수(星州敎授), 충주교수(忠州敎授)
증직및기타 이조판서(吏曹判書)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5세 되던 해 글공부를 시작했다. 부친이 말로 글자를 가르쳤는데, 배우면 금방 이해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이에 부친이 기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고 전한다.

[묵계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다]
30세 되던 해 안동부의 길안(吉安) 묵계(默溪)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였다. 터를 잡은 곳은 산림이 울창하고 경관이 뛰어나 일찍부터 왕래하면서 동경해 오던 장소인데, 이 해에 농막을 짓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했다.

[조카인 학조 스님의 무례를 꾸짖다]
32세 되던 해 성주향교의 교수(敎授)로 부임하였는데, 학조(學祖) 스님이 무슨 일로 성주에 들렀다가 향교로 직접 가서 숙부를 만나 뵈려고 하였다. 학조는 세조 때 왕의 두터운 신임으로 국사(國師) 대우를 받던 스님으로서, 김계행의 장조카이다. 학조의 뜻을 접한 목사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하여 이를 말리며 “국사께서는 수고롭게 거동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교관은 제가 청해서 오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향교로 보냈다. 그러나 김계행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자. 학조가 부득이 가서 뵐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너는 왕의 총애만 믿고 교만해져 숙부를 찾아와 뵙지 않고 이 숙부보고 너를 찾아오라고 하느냐.”며 매로 꾸짖었는데,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학조가 잘못을 사죄하고 김계행의 벼슬길에 자신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으나 명분이 없는 일이라 하여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써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김종직과 평생을 교유하다]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과 평생에 걸쳐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杖刑)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 일은 뒤에도 수시로 그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었는데, 심지어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금부에 끌려가 형벌을 치르는 곤혹을 겪기도 하였다.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다]
49세 되던 가을 식년 동당시에 합격하였는데, 연만한 나이가 고려되어 바로 육품직에 올랐다가 이어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52세 되던 해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왔다. 항상 청렴과 근신하는 태도를 지키며 매사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과 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섭렵하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응교(應敎), 전한(典翰)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掌令)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의 교유가 빌미가 되어 모함을 받아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조호문(趙好問) 등 10여 명과 함께 투옥되어 태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일로 그 뒤에도 두 번 더 옥고를 치렀다.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듣고 복잡한 감회를 토로하다]
76세 되던 해(1506)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보백당과 만휴정을 짓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있다가 68세 되던 해(1498)에 풍산 사제(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왔다. 김계행은 또 30대 젊은 시절부터 길안(吉安)의 묵계촌의 풍광에 심취하여 별장을 지었는데, 특히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는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던 장소였다.

 

가족 이야기

가족 정보
김혁(金革) 생부 김삼근(金三近)
영가김씨(永嘉金氏) 김전(金乷)의 딸

[첫째 부인 서씨와 사별하고, 둘째 부인 남씨와 재혼하다]
17세 되던 해 동복현감을 지낸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운(李運)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23세 때 사별하였고, 이듬해 지평(持平)을 지낸 의령남씨(宜寧南氏) 남상치(南尙致)의 딸과 재혼하였다. 첫째 부인이 죽었을 때 김계행은 한양에 있었는데, 부인의 부고를 접하고 급히 돌아와 손수 예천의 용궁(龍宮)에 장사를 지냈다.

[첫째 부인 서씨와의 인연]
첫째 부인 서씨의 부친은 동복(同福) 현감인 서운이다. 서씨가 처녀로 있을 때 처음 배필로 혼담이 오고간 것은 황희(黃喜) 정승의 아들이었다. 혼담이 성사되자 황희는 혼인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문경현(聞慶縣)에 와서 유숙을 하였다. 그러다가 혼인 날 아침이 밝자 길을 재촉하였는데, 서운과 이웃해 살고 있는 사람 하나가 길에서 뵙기를 청하였다. 그는 서운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혼인을 방해할 속셈이었는데, 황희가 서씨의 됨됨이에 대해 묻자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소경이라는 말은 들은 듯하다고 거짓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황희는 펄쩍 뛰며 바로 사람을 보내 혼인 약속을 파하였다. 이에 서운도 크게 노하였다. 이 때 마침 김계행의 부친이 비안현감으로 있을 때이고, 김계행은 처음 진사가 되어 한양서 비안으로 친영하러 와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서운이 사람을 보내 혼담을 건네 옴으로써 혼인이 이루어졌다. 혼인하던 날 서운은 상주(尙州) 본가에 와 있던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 딸의 소경 모습을 한 번 보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에 황희는 아들의 유모를 보냈다. 하지만 혼인식 날 신부석에 있는 처자가 소경이 아니라 용모가 너무 아름다운 규수인 것을 보고 유모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이를 전해 들은 황희 역시 자신이 서운의 이웃사람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후회하고는 서운의 둘째 딸에게 혼담을 다시 넣어 성사시켰다고 전한다.

[자식복을 스스로 경계하다]
슬하에 모두 5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첫째 부인 서씨의 소생이고, 다섯 아들은 둘째 부인 남씨의 소생이다.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극인(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둘째 극의(克義)는 진사, 셋째 극례(克禮)는 생원, 그리고 막내인 극신(克信)은 무과에 합격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냈다. 찰방(察訪)을 지낸 박눌(朴訥)과 진사 류자온(柳子溫)이 각각 첫째와 둘째 사위이다. 류자온은 서애 류성룡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류성룡은 『보백당선생실기』를 간행할 때 「영모록(永慕錄)」이라는 추모의 글을 지어 문집에 싣기도 하였다. 김계행이 81세 되던 해 내외의 종친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 일이 있는데, 이 때 아들과 조카 가운데 대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명이고 관직에 오른 사람이 7명이나 될 정도로 자식 복이 다복하였다. 이에 보는 이마다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를 두고 김계행은 자손들에게 타일러, “너희들이 잇달아 과거에 합격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이를 두고 이 고장 사람들은 더러 내가 복이 많다고 하겠지만 나로서는 집안의 번영이 한편으로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명심해서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고 사람들을 접함에 정성을 다하여 경박한 일로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이 늙은이가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시켰다.

[지극 정성으로 부친을 간호하다]
34세 되던 해 부친이 병환에 들자 의관을 벗지 않은 채 밤에도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친히 약을 다려 올리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며, 그러기를 여러 달을 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죽만 먹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채과(菜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 결과 몸이 쇠약해져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여막을 지키며 예서(禮書)를 읽었고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묘소를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문 이야기

학문 정보
스승 묵계서원(默溪書院)
학파 퇴계 학파

[교유인물]
김종직(金宗直), 성희안(成希顔), 성희증(成希曾)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재질을 보였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또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입학한 지 3여 년 만에 문학과 예술 방면에 큰 성취가 있었다고 전한다. 14세 되던 해 부친이 비안(比安)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5세에는 사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중용』과 『대학』을 수강하였다.

[김종직과 학문을 논하다]
평생의 지기였던 김종직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또한 학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충주향교의 교수에서 물러나 풍산 고향집에 돌아와 있던 때인 40대 중반 시절에는 당시 상주에 있던 김종직과 서로 왕래하면서 『주역』과 『근사록』을 직접 강론하기도 하였다.

[성리설에 심취하다]
굳고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성리(性理)의 문제에 침잠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였다.

옥고

생애 이야기

인물 정보
성명 옥고(玉沽) , 1382년 ~ 1436년 본관 의령(宜寧)
대수 응계(凝溪)
출생지 김해(金海) 분묘지 군위(君威) 어응곡(於應谷)
입사경로 생원시(生員試)합격, 1399년(정종 1) 식년시(式年試) 급제
내관직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외관직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대구군사(大丘郡事), 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

[가족관계]
증조 옥전백(玉全伯)은 생원으로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에 추복(追封)되고 조 옥안덕(玉安德)은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옥 사미(玉斯美)는 생원으로 진성감무를 지내고 김해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군위로 이거하여 졸하였는데 향년 55세였다. 부인 노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조사빈에게 시집갔다. 후부인 김씨는 공의 묘 왼쪽에 장례하였는데,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옥현(玉衒)은 진사로 사온서부직장(司署副直長)이고, 딸은 현감 강기(康耆)와 김보인(金寶仁)에게 시집갔다. 옥현의 두 아들은 참군(參軍) 옥자영(玉自英)과 습독(習讀) 옥자화(玉自華)이다. 옥자화의 5세손 국자 생원(國子生員) 옥세보(玉世寶)는 형제가 다섯으로 별도의 자손록(子孫錄)이 있다.

학문 이야기

학문 정보
스승 야은(冶隱) 길재(吉再)
향사 묵계서원(默溪書院) 학파 퇴계 학파

[면밀한 그의 학문관]
길재의 문인이며 1399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에 배치되어 박사·전적 겸 교수 등을 지냈다. 이때 사도(師道)를 엄히 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공이 학문에서 성취한 바는 공이 지은 「인심선악상반도(人心善惡相反圖)」와 「음양번역성괘도(陰陽變易成掛圖)」 두 도설에서 드러나니, 그 자질이 깊고 분석이 정미하여 주돈이와 소옹의 뜻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주변 정보

 

[촬영 명소]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만휴정

영화 : 미인도(2008), 사도(2014) 등
드라마 : 조선총잡이(2014), 공주의 남자, 왕은 사랑한다(2017), 미스터 션샤인(2018) 등 
욘사마루트 : 배용준의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보백당종택ㆍ묵계서원
주소 : 경북 안동시 길안면 충효로 17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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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대관 보백당종택ㆍ묵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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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보백당종택- 안채 보물&청백방 (청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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