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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은살아있다]<14>안동시 풍천면 안동권씨 가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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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21 오후 4: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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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宅은 살아있다] <14>안동 풍천면 안동 권씨 가일마을
풍산들 접은 은둔 터, 무욕이 지켜 온 소탈의 격조
 
   
 
 
  병곡의 셋째 아들 수곡 권보(1709~1777)의 유적을 기리기 위해 손자 권환이 지은 수곡고택 안채. 주춧돌은 막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ㄷ자형 안채는 모두 2층 다락방으로 연결된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한옥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병곡종택의 역사를 간직한 회나무. 나무 기둥에는 옛날에 기름을 짜기 위해 지렛대를 꽂았던 큰 구멍이 남아 있다. 권종만 종손이 기름을 짜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마을 입구 연못에서 바라본 가일마을. 마을 뒤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으로 마을을 품고 있는 가운데 병곡종택과 수곡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안동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가 있다. 안동 권씨`안동 김씨`안동 장씨다. 이른바 삼태사(三太師)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개국공신들이다.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등이다.

삼태사는 신라 말엽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자 반드시 왕의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때를 기다렸다. 930년(태조 13년), 마침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견훤과 싸우게 되자 태조를 도와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는 삼태사의 공을 높이 치하해 원래 경주 김씨였던 그들에게 행은 권(權), 선평은 김(金), 길은 장(張) 등 본을 안동으로 하는 성과 태사의 벼슬을 내리고 공신으로 봉했다.

이 가운데 안동 권씨는 1천800여 년을 안동을 기반으로 세거하면서 영남 인재들의 후견인과 든든한 정치적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는 입향에서부터 지금까지 올곧게 살아온 안동 권씨 복야공파 후손들의 삶이 녹아있다.

 

◆관직에는 무욕, 학문에는 진력했던 가일 후손

가일마을은 안동 권씨 14파 가운데 복야공파의 한 갈래가 600여 년을 살아오고 있다. 세종 때 정랑을 지낸 참의공 권항(權恒)이 이 마을의 부호였던 류서(하회 입향시조 류개의 손자)의 딸에게 장가들어 등과한 후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안동 권씨가 뿌리내렸다.

조선 선비들은 물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구국운동에 몸바쳤던 지사, 만주항일투쟁에 참여했다가 생을 마친 후손들이 여럿 있다.

권항의 손자 화산 권주(花山 權柱`1457~1505)는 문과에 아원(2등)으로 급제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권주는 하지만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에 연루돼 사사당하고 정부인 고성 이씨의 자결, 아들 사락정 질의 유배 등 일가족이 참사를 맞고 2년 후 중종반정으로 관직과 가산을 돌려받았으나 후손들은 정치적 허탈함을 달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권주의 넷째 아들 권굉은 "아예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손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다 3대에 걸쳐 벼슬이 없으면 반격(班格)이 떨어지게 돼 25세 권박에 이르러서 다시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병곡 권구(屛谷 權渠`1672~1749)는 서애 류성룡과 갈암 이현일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학자로서의 명승을 드높였다. 특히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누명을 쓴 후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탐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사후 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가일마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로 향하는 초입에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연못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을 하고 마을을 품고 있다.

마을 앞에는 하회마을의 지맥을 잇고 있는 화산이 버티고 서 있으며 풍산들이 넓게 형성돼 있어 '풍요로움' 그 자체다. 이렇듯 넓은 평야를 앞에 두고도 자신을 바깥세상으로부터 감추고 있는 가일마을은 격조 높은 고립성, 즉 온갖 박해와 정치권력의 암투에서 벗어나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가일마을 안동 권씨 후손들의 뜻과 상통하고 있다.  

 

◆올곧은 선비 뜻 품은 '병곡종택'과 '수곡고택'

가일마을의 안동 권씨 종가는 화산 권주의 옛 집인 '병곡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370호)이다. 당호는 '시습재'(時習齋). 권주 선생이 승정원 주서로 재직할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갑자사화에 연루돼 사사되고, 가족은 예천으로 떠나는 등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세 권전,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27세 권구에게 각각 금부도사가 찾아왔던 것.

병곡종택은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다. 지금껏 양자(養子) 없는 적장`적통으로 종가를 잇고 있는 것. 시습재 입구에는 회나무 한 그루가 수백 년 집안과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듯 서 있다. 종택은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가 사용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크기가 소박하다. 전형적인 口자형 집 옆 담장과 작은 출입문은 사당으로 드나들기 좋도록 설계됐다. 시습재 옆으로 지난해 중건돼 새단장을 한 '환와서실'(丸窩書室)이 눈에 띈다.

병곡종택을 지키고 있는 37세 권종만 종손은 "이 집은 지금까지 적자적통을 잇고 있다. 후일 병곡 선생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았던 흔적들이 당호나 서실 이름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병곡종택에서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면 수곡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76호)이 나온다. 병곡의 셋째 아들로 평생 도학에 심취해 검소한 생활을 해 온 수곡 권보(1709~1777)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해 손자 권환이 지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우암 권준희와 그의 손자인 독립운동가 권오상 선생이 태어났다. 팔작으로 꾸미지 않고 맞배지붕으로 지은 검소한 양반가다.

 

◆기와지붕 잡초도 사람의 온기 느껴

수곡고택은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건립된 지 220여 년, 고택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이 집에는 후손 권대송(72) 씨가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학교 때문에 외지로 나가면서 1970년 초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이다.

40여 년 세월동안 비어 있던 수곡고택은 2009년 1월부터 안동에 있는 (사)경북미래문화재단이 관리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들고 있다.

권대송 씨는 "집에 사람이 안 살면 기와지붕에 이끼와 잡초가 먼저 안다. 마당에는 잡풀을 뽑아도 뽑아도 무성하게 돋아나고 기왓장 사이로 잡초가 비집고 올라온다"며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기와지붕 잡초들이 먼저 알고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이 집 마당에서 안채까지 가기 위해서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을 세 곳이나 올라야 한다. ㄴ자형 사랑채와 ㄷ자를 엎어 놓은 안채가 서로 다락방으로 연결된 특이한 구조다. 사랑채와 안채 앞으로 자연석으로 쌓은 높다란 기단이 있고 기둥 밑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 다듬지 않은 막돌 자연석을 사용해 투박하면서도 검소함을 보여주고 있다.

경북미래문화재단이 이곳을 새롭게 꾸며 해마다 고택음악회와 마을가꾸기사업, 고택체험을 진행해오고 있다. 한 달 평균 80여 명이 다녀가는 고택체험은 천연염색과 널뛰기`투호던지기 등 전통놀이 체험, 한지체험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경북미래문화재단 배순향(48) 씨는 "전통문화를 배우고 즐기면서 가일마을 정산의 기운, 선조들의 도학적 가르침을 동시에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숱한 사회주의운동가 배출 '안동의 모스크바'

가일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이 때문에 이 마을은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린다.

권오설(權五卨`1897~1930) 선생은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복역하고 석방 후 귀향해 안동군 일직면 일직서숙(一直書塾)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20년 안동청년회에 가입하고 안동의 풍산소작인조합을 지도했다.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 화성회(火星會)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조선공산당과 관련한 역할과 활동을 해 왔으며 '6`10 만세사건'을 계획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2008년 일제가 항일투사 권오설 선생의 시신을 철관에 넣어 매장했다는 소문이 선생의 묘를 합장(合葬)하던 후손들에 의해 그 실체가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권오설을 따른 집안 청년들 중 권오상(1900~1928)과 권오운(1904~1927)은 각각 6`10 만세운동 때 구속된 뒤 각각 1928년과 1927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했다. 권오설마저 1930년에 옥사해 한 문중의 세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안기성(1898~?)도 가일 출신이다. 그는 해방 후 월북해 한국전쟁 중 유격대 제7군단의 이른바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나 1953년 숙청됐다.

권오설의 막냇동생 권오직(1906~1953)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일제강점기 때 두 차례나 구속되어 복역하다 해방 후 출옥했다.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다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중국 대사 등을 거쳤으나 전쟁 직후 안기성과 같은 시기에 숙청됐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사학과 교수)은 "병곡 권구 선생도 권오설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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